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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 컬럼-김세영과 역전의 시대

성호준 기자2015.04.20 오전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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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발판을 만드는 칩샷을 홀에 넣은 후 환호하는 김세영. 그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을 만드는, 즉 기적을 부르는 선수다. 그러나 마리아노 리베라처럼 1점 리드를 지키는 능력도 필요하다.

김세영이 19일 LPGA 투어 롯데 챔피언십에서 프로가 된 후 처음으로 최종라운드를 선두로 시작해서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한때 3위로 밀려났다가 17번 홀 내리막 5m 파퍼트로 버텼고, 마지막 홀 칩샷을 넣어 기사회생했다. 그리고 화끈한 샷이글이 터졌다.

김세영은 이전 6번의 우승을 모두 역전승으로 장식했지만 리드를 지킨 건 처음이었다. 김세영은 지난 대회인 ANA 인스피레이션에서는 최종라운드 3타 리드를 날렸다. 김세영에겐 승리를 지키는 것 보다 역전이 훨씬 쉬워 보인다.

골프에서 역전승과 승리를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

최종라운드를 선두로 출발하는 것은 숫자로 보면 분명 유리하다. 1번 홀이 파 4이고 2타 앞섰다면 티잉 그라운드가 아니라 그린에서 경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4타 앞섰다면 2번 홀에서 시작한다. 앞서 나가서 나쁠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요즘 결과는 반대다. LPGA 투어와 PGA 투어 결과를 뒤져 보면 최종라운드 선두 선수가 우승을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올해 열린 LPGA 9개 대회에서 3라운드까지 선두가 최종라운드에서 우승을 빼앗긴 역전 경기는 5번 나왔다. LPGA 투어 빅 3인 리디아 고(코츠 챔피언십), 박인비(바하마), 스테이시 루이스(혼다 타일랜드) 모두 올 시즌 3라운드 선두였다가 역전패를 당한 경험이 있다.
PGA 투어에서도 20일까지 올 시즌(2014~2015) 열린 21개 대회에서 4라운드 역전이 15번 나왔다. LPGA 투어는 역전 비율이 56%, PGA 투어는 71%다. LPGA 투어와 PGA 투어를 합치면 올해 최종라운드 역전 경기 비율은 68%다. 4라운드를 선두로 출발하는 선수에게 돈을 걸면 잃을 가능성이 더 크다.



올해 LPGA 투어 우승자는 3라운드를 마칠 때 순위가 평균 2.3위였다. PGA 투어에서는 54홀 스코어로 평균 4.1위가 우승자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숫자로 보면 4라운드를 선두로 출발한다고 좋아할 이유가 별로 없다.

LPGA 투어가 원래 이렇게 역전이 많지는 않았다. 2006년부터 올 시즌까지 10시즌(260경기)을 보면 최종라운드 역전 경기수는 87로 비율은 33%다. 우승자의 3라운드까지 순위는 평균 1.9위였다. 지난해부터 역전 비율이 부쩍 늘었다. 2014년부터 올해 20일까지 열린 41경기에서 역전 비율은 54%다. 우승자의 3라운드 평균 순위는 3위다.

예전엔 안니카 소렌스탐이나 로레나 오초아, 청야니같은 강력한 마무리투수가 존재했기 때문에 블론세이브가 적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 선수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 됐다. 최종라운드에서 누가 더 잘 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졌다. 지난해 카리 웹은 JTBC 파운더스컵에서 4라운드를 20위로 출발했다가 우승하기도 했다. 역전 당하는 선수들은 매우 괴롭겠지만 경기는 드라마가 많아지고 팬들로서는 더 재미있다.

PGA 투어는 전통적으로 LPGA 투어에 비해 순위 변동이 다이나믹했다. 그런데도 최근 역전의 비율이 늘었다. 최근 두 시즌 역전 비율은 62%로 지난 10년 평균에 비해 10% 포인트가 높다. 2012년과 올 시즌 우승자의 3라운드 평균 순위는 4.1위다. 3라운드까지 10위 이내에서 누가 우승해도 이상할 게 없다.

역전 비율이 높다고 해도 앞서고 있는 선수보다 쫓아가는 선수가 유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앞서가는 선수는 한 명이거나 기껏해야 두세 명(공동선두)이다. 쫓아가는 선수는 다수다. 따라서 선두로 나선 선수가 우승할 가능성이 50%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쫓아가는 선수의 우승 가능성이 50%가 넘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선두 A와 나머지 추격권에 있는 B, C, D, E, F 등을 합친 그룹의 우승 가능성을 비교하면 A를 제외한 나머지가 높다. 그러나 개별 선수인 B, 혹은 C의 우승 가능성은 A보다는 훨씬 낮다. 따라서 선두가 불리하니 일부러 퍼트를 빼고 최종라운드에서 역전을 노릴 이유는 없다.

거대한 흐름은 역전이 많아지는 쪽으로 흐르는데 작은 흐름도 있다. 54홀까지 선두 선수가 조용히 경기를 마무리하는 경기가 몇 번 나오면 유행이 된다. 12개 대회 연속 3라운드 선두가 우승을 하기도 했다. 반대로 시끄러운 역전승이 몇 번 터지고 선수들의 뇌리에 ‘역전’이라는 단어가 강하게 입력되면 역전이 흔해진다. 올해 PGA 투어에서 WGC 캐딜락 챔피언십에서 JB 홈즈가 5타 차 리드를 날리는 등 9개 대회 연속 역전 경기가 나왔다. 2012년 PGA 투어에서는 카일 스텐리가 최종라운드를 5타 차 선두로 나섰다가 역전패했는데 바로 다음 경기에서 6타 차 선두였던 스펜서 레빈에게 역전승했다.

역전은 2위와의 타수 차에 따라 차이가 있다. 미국 골프 채널 선임 연구원인 저스틴 레이는 2월15일까지 지난 두 시즌 PGA 투어의 54홀 선두를 타수 차 별로 분석을 했다. 한 타 차 선두로 나선 16명 중 우승을 한 선수는 5명으로 31%였고, 2타 차 선두였던 12명 중 우승을 한 선수는 4명으로 33%다. 3타 차 선두 선수는 7번 있었는데 3번 우승(42%)이 나왔다. 4타 이상은 7번 중 6번(86%)이 리드를 끝까지 지켰다.

한 두 타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우승한 선수가 9번 이었던 데 반해 한 두 타 뒤지던 선수가 우승한 경우는 15번 있었다. 샘플이 크지는 않지만 이 통계로 보면 한 두 타 뒤가 더 좋은 자리로 보인다. 또 3타 차 선두까지는 역전이 된 경우가 더 많았고 4타 차 이상이 되면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54홀 선두로 최종라운드에서 쫓기는 선수의 압박감은 존재하며 통계로 나온다. 미국의 골프 저술가 데이비드 베렛은 2012년 PGA 투어의 첫 20경기에서 54홀 선두 선수들의 최종라운드 평균 스코어가 71.90타로 전체 평균(71.62)에 미치지 못했다고 썼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5년여 분석 결과도 비슷하게 나왔다. 당시 “인간이 아닌 로봇”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던 특별한 존재 타이거 우즈를 제외한 54홀 리더의 최종라운드 평균 스코어는 71.35로 전체 선수 평균인 71.19보다 못했다. 3라운드까지 선두를 지킨 선수는 컨디션과 샷감이 가장 좋은 선수라고 볼 수 있다. 그 선수가 최종라운드가 되면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낸 것이다.

압박감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선두에 나선 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컨디션이 좋은 상위권 선수들은 최종라운드에서 어땠을까. 베렛은 2011년과 2012년 상반기 PGA 투어의 54홀 20위 이내의 선수들을 성적을 살펴봤다. 20위 이내 선수들은 최종라운드 스코어가 71.06으로 전체 평균(71.33) 보다 좋았다. 3라운드까지 잘 친, 컨디션이 좋은 선수들이 최종라운드에서도 잘 치는 것이다. 단지 가장 앞에 있는 선두만 흔들렸다. 1위만 부진하고 2위부터는 좋은 성적을 내면 역전이 잘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최종라운드 선두의 압박감은 엄청나다. 최나연은 2008년 에비앙 마스터스에서 선두로 나섰을 때 마지막 4홀을 남기고 클럽을 잡기도 어렵다고 느낄 정도로 팔이 떨렸다고 했다. 역전패했다. 이미림은 LPGA 투어 두 번 우승이 모두 역전승이다. 돌 위에 올라간 공을 파세이브 하는 등 멋지게 경기했다. 올해 기아클래식에서 최종라운드 선두로 시작했을 때는 첫 홀과 두 번째 홀에서 보기와 더블보기를 하면서 우승을 놓쳤다. 김세영도 3타 차 선두로 최종라운드를 시작한 ANA 인스피레이션에서 4퍼트를 하기도 했다.

54홀 리더가 우승할 가능성은 경험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렛에 의하면 2003년에서 2012년 중반까지 54홀 리드를 처음 해본 선수가 우승한 것은 31.9%였다. 최종라운드 선두로 두 번째 경기에 나선 선수가 우승 한 비율은 34.4%, 세 번째는 38.3%다. 3분의 2 이상의 선수가 최종라운드를 선두로 출발해 우승하지 못한다. 경험이 쌓이면 가능성은 높아지지만 크게 오르지는 않는다. 부담 없는 역전 우승으로 경험을 쌓은 후에야 선두로 나선 경기에서도 우승을 지키는 선수가 대부분이다.

선수의 나이나 능력과도 관계가 있다. 골프채널에 의하면 1994년부터 2010년까지 짐 퓨릭(45)은 17번 선두로 최종라운드를 시작해 10번 우승했다. 이후 퓨릭은 54홀 선두로 9번 경기를 했는데 모두 우승을 날렸다. 퓨릭은 20일 RBC 헤리티지에서 우승했는데 선두로 출발한 경우가 아니라 역전 우승이었다.

지키는 게 편한 선수가 있고, 쫓아가는 게 편한 선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타이거 우즈는 2009년 양용은에게 역전패당할 때까지 54홀 선두로 나선 14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한 번도 역전당하지 않았다. 반면 타이거도 메이저대회에서 역전승은 한 번도 못해봤다. 전성기 타이거처럼 강한 카리스마가 있는 선수는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때문에 역전을 잘 허용하지 않는다. 스튜어트 싱크는 “우즈와 최종라운드 우승 경쟁하는 것은 마취 없이 수술 받는 것처럼 괴롭다”고 했다. 나머지 선수들은 쫓기는 것 보다는 쫓는 것이 잃을 것이 없고 그래서 훨씬 편하게 느낀다.

김세영의 롯데 챔피언십 우승은 기록상으로는 지킨 우승이지만 뜯어보면 애매한 부분이 있다. 김세영은 경기 중 리드를 날렸다. 18번 홀 티샷을 물에 빠뜨리고 벌타를 받으면서, 야구로 치면 블론 세이브를 했다. 이 때 쫓기는 자에서 쫓는 자로 위치가 바뀌었다. 추격자가 되면서 김세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선수가 됐다. 기적같은 칩인과 이글이 나왔다. 김세영은 그의 말대로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습관화되는, 즉 기적을 부르는 선수다.

반면 더 큰 선수가 되려면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처럼, 타이거 우즈처럼 냉정하게 경기를 지키는 마무리 능력도 필요하다. 최경주와 박세리도 리드를 잡으면 결코 놓지 않는 끝내기에 매우 뛰어난 선수였다.

김세영의 우승은 매우 드라마틱하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난타전이 아니라 1점차 리드를 끝까지 지키는 짜릿한 투수전도 보고 싶다. 불처럼 뜨거운 역전의 여왕 김세영이 마무리 투수로 차가운 공을 던지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역전이 잦아진 역전의 시대에 더욱 소중한 가치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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