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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함께 새로운 출발선상에 선 이지영

이지연 기자2015.12.05 오전 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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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활동했던 장타자 이지영. 오늘 스키점프 국가대표 출신 김흥수 씨와 결혼을 올리는 그는 새로운 출발선상에서 행복한 단꿈을 꾸고 있다.

신데렐라가 된 장타자

이지영은 2005년 로또에 당첨됐다. 국내 투어 루키였던 2005년 제주도에서 열린 나인브릿지 클래식에 출전해 비회원 신분으로 우승하면서 LPGA 투어로 직행했다. 2003년 안시현에 이어 두 번째였고 모두 그를 신데렐라라고 불렀다.

2006년 LPGA 투어에 데뷔한 이지영은 최고의 파워히터로 인정받았다. 카린 쇼딘, 소피 구스타프손(이상 스웨덴) 등이 그보다 조금 더 멀리 쳤지만 똑바로 날리지는 못했다. 이지영은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장타를 앞세워 35번이나 톱 10에 들었다. 2007년에는 상금랭킹 10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35번이나 톱 10에 들면서 우승을 못했다, 무려 9번이나 아쉬운 2위를 했다. 이지영은 “2006년 웬디스 챔피언십 때는 21언더파를 치고도 24언더파를 친 로레나 오초아가 있어 우승을 못했다. 2007년 브리티시여자오픈 때도 오초아에게 막혀 2위를 했다. 잘 했지만 늘 앞에 오초아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가장 아쉬운 대회는 2007년 킹스밀 챔피언십이었다. 수잔 페테르센(노르웨이)과 연장전에 간 이지영은 4m 거리에서 3퍼팅을 해 우승컵을 빼앗겼다. 이지영은 “파 퍼팅이 불과 50cm 거리였는데 나를 다스리지 못해 넣지 못했다. 그 때 기억은 아직도 생각하면 많이 아프다”고 말했다.

2010년 가을 진짜 고통이 시작됐다. 통증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오른쪽 손목 안에 물혹이 발견됐다. 전부터 신경끼리 부딪혀 통증을 느껴왔던 이지영은 하나은행 챔피언십을 마친 뒤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은 간단했지만 회복의 시간은 길어졌다. 이지영은 2011년 시즌 15개 대회에 나가 10번이나 컷 탈락을 했다. 상금랭킹은 116위로 곤두박질쳤다. 2012년에도 13개 대회에서 5번이나 컷 탈락을 당했고, 상금랭킹 90위로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이지영은 “수술하고 나서 감이 너무 없어져 버렸다. 전에는 다운블로로 힘껏 내리쳐 디보트 자국을 많이 내는 샷을 했는데 수술 뒤 전혀 찍어 치지 못했다. 통증은 여전했고 시합 기간에도 자다 일어나 아이스 팩 찜질을 하면서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많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큐피트의 화살을 맞다

당시는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면 부상 때문에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술 이후 2년 여 재활을 병행하면서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아진 이지영은 2012년 여름 한국에 다니러 나온 사이 운명의 짝을 만났다.

친분 있는 화가의 소개로 나간 자리였는데 김흥수씨가 앉아 있었다. 김씨는 스키 점프 선수들의 실화를 영화화한 '국가대표'의 실제 모델로 은퇴 뒤 최연소 경기위원장이자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 스키 점프 스포츠 매니저로 근무 중이다. 이지영은 김흥수씨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골프와 스키 점프로 종목은 다르지만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공통점에 서글서글한 성격에 끌렸다.

이지영과 김씨는 만난 지 3달째인 10월 13일부터 연인 관계가 됐다. 김씨의 지인 결혼식 피로연에 함께 갔고, 그 날 저녁 고백을 받았다. 이지영은 “오빠는 열정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자상하고 배려심도 많다. 때로는 그런 게 지나쳐 잔소리를 할 때도 있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아빠랑 비슷한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둘은 태평양을 건너 3년을 매일같이 사랑을 속삭였다. 이지영은 시즌 중 바쁘고 시즌이 끝나는 겨울에 시간의 여유가 있다. 반면 스키 점프를 한 김씨는 겨울이 가장 바빴다. 그러나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인지 서로에 대한 애뜻함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

김씨는 지난 4월 이지영의 집에 찾아와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이지영은 “(한)희원 언니나 (장)정이 언니처럼 결혼해서 잘 사는 언니들을 보면서 나도 빨리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오빠가 부모님께 정말 잘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되겠구나’라는 결심을 궂혔다”고 말했다.

박수칠 때 떠나다

이지영은 결혼 결심을 하기 전 이미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에 건너갔던 2006년부터 딱 10년만 열심히 하고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고 올해가 그 10년이 되는 해였다. 이지영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10년이라는 시간은 길면서도 짧은 것 같다. 지난 해 말부터 ‘제 2의 인생’을 준비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더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의 이지영은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한 편이었다. 한국 선수 대부분과 두루 친했고, 폴라 크리머(미국), 미야자토 아이(일본), 산드라 갈(독일)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래도 적응이 안 된 건 매주 이동해야 하는 삶이었다. 이지영은 “매주 짐을 싸고 이동해야 하는 삶은 시간이 지나 적응이 된다기보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힘들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비행기로 이동을 했지만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어 5시간 이상의 거리가 아니고서는 차로 운전해 다녔다. 1시간 반이면 비행기로 갈 거리를 10시간 걸려 간 적도 있다. 대회장에 도착하면 마사지를 받는 게 생활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이지영은 지난 8월 말 열린 요코하마 타이어 클래식에서 10년을 정리하는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은퇴 소식이 알려지자 투어의 동료들은 크게 아쉬워했다. LPGA 투어 31승을 거둔 전설줄리 잉스터는 대회 기간 중 시간을 내 이지영에게 고기와 맥주를 사줬다. 허미정, 강혜지, 유선영, 김세영 등 친한 후배, 캐디들과도 송별 파티를 했다.

이지영은 대회 마지막 날 5언더파를 적어내며 최종 합계 4언더파 공동 35위로 은퇴전을 마쳤다. 3,4라운드에서 함께 라운드한 최운정의 캐디 백을 멘 아버지 최지연씨는 “이렇게 거리도 많이 나가는 데 왜 벌써 그만두냐?”고 아쉬워했다. 이지영은 “지난 몇 년 동안은 수술 뒤 위축되면서 스트레스를 적지 않게 받았다. 그러나 마지막 대회라고 생각하니 ‘그동안 볼이 안 맞는다고 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즐겁게, 후회없이 쳤다. 우승과는 상관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마지막 날 선물을 주신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은퇴 이후의 삶

9월 초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지영은 결혼식 준비에 들어갔다. 틈틈이 요리와 킥 복싱을 배우는 등 취미 활동을 하면서 소소한 일상생활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이지영은 “아직도 시즌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TV로 동료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다시 저 곳에 못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빠질 때도 있다. 그러나 운동선수가 아닌 평범한 서른 살 이지영의 삶을 더 멋지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12월 5일 김흥수씨와 결혼하는 이지영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설레임에 빠져 있다. 이지영은 “요리하는 것을 워낙 좋아해 한식, 베이킹 등을 제대로 배울 예정이다. 결혼하면 남편의 아침 밥상은 꼭 차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내년에는 용인대학교 골프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해 못다 한 공부를 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선수 시절부터 입담이 좋기로 유명했던 그는 방송 관련 일도 하고 싶어 한다. 이지영은 “어릴 때부터 마이크 잡는 것을 좋아했다. 골프 방송을 생각하면 딱딱하다는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누구나 편하게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 은퇴한 (장)정이 언니랑 함께 토크 쇼를 하면 제대로 썰을 풀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는 셋 정도 가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자매로 자란 이지영은 둘도 외롭다고 느낀다. 이지영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골프를 하면서 외로움을 많이 탔다. 아이가 셋 정도는 되야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일 것 같다. 오빠에게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아이도 많이 낳고 싶으니 돈 많이 벌어올 각오를 하라고 말했다”고 웃었다.

이지연 기자 eas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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