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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 칼럼-전인지의 반딧불

성호준 기자2015.10.26 오후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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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미국 뉴욕주 랭카스터에서 벌어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전인지. 그는 낮에는 치열한 우승경쟁을 펼쳤고 밤에는 반딧불을 보면서 세상을 밝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전인지는 올해 US여자 오픈이 벌어진 미국 뉴욕주 랭카스터 지역 자선단체에서 기부 요청을 받았다. 암투병 환자를 위한 모금 행사를 하는데 대회 당시 깃발에 사인을 해 보내주면 경매를 해서 자선기금에 보태겠다는 거였다.

전인지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달랑 깃발만 보내지는 않았다. 깃발은 물론, 직접 사인한 사진과 1만 달러 수표도 함께 넣었다.

현지 신문에 의하면 이 단체에서 모금을 담당하는 조디 키글은 “우리는 전인지에게 깃발만 요청했지 자선기금은 요구하지도 않았다. 전인지가 어렵게 자랐다고 알고 있는데 이렇게 큰돈을 보내서 놀랐다. 너무나 큰돈이어서 혹시 1000달러가 아닌지 수표의 0을 세고 또 셌다”고 말했다.

전인지는 함께 보낸 편지에서 “암 투병중인 환자들이 진정한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썼다. 키글은 편지에 적힌 전인지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전인지 편지의 영어 문법이 100% 맞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한 댓글은 “브로큰 잉글리시가 그렇게 아름답게 쓰여진 건 처음 봤다”고 했다.

전인지는 “경기를 할 때 지역민들의 응원이 큰 도움이 됐고, 그래서 나도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왜 하필 1만 달러였을까. 전인지의 답변이 감동적이다. 그는 “대회가 열린 랭카스터에는 유난히 반딧불이 많았어요.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되어 있는 등처럼 많았어요. 그걸 보면서 밤하늘을 가득 채울 수 있다는 생각에 한자 찰 만(滿)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 달러를 보내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반딧불을 보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생각하고, 어둠을 빛으로 채우는 사랑을 생각하고, 만 달러 기부를 생각한 것이다.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진 전인지는 그런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 약속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 대회 샬롱 파스컵에서 우승한 후 전인지는 3000만원을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를 기부했다. 응원해 준 팬들이 고마워 자신과 스스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란다.

일본에서 전인지는 올해 메이저 2승을 했다. 인기가 아주 높다. 대회 관계자들로부터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투어 챔피언십에도 나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출전 약속을 했다. 그러나 최근 국내에서 ING 챔피언스 트로피라는 대회가 생겼다.

LPGA 투어에 나가 있는 한국 선수들과 KLPGA 투어의 선수들간의 이벤트 형식의 팀 매치 경기다. 당연히 상금랭킹 1위 전인지에게도 참가 요청이 왔다. 공교롭게도 일본 대회와 일정이 겹친다.

어차피 내년 미국 진출 때문에 일본 투어에 갈 것도 아닌데 일본 대회는 안 나가도 되는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인지는 약속을 택했다. 전인지는 “보이는 곳이든 보이지 않는 곳이든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했다. 연합뉴스 권훈 기자에 의하면 전인지는 “먼저 출전을 약속한 일본 대회에 나갈 생각”이라면서 “몸이 하나뿐이라 흥미진진한 대회에 참가하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골프 선수는 프리랜서다. 단체 종목 선수들은 팀에서 연봉을 보장받지만 골프나 테니스 등 개인종목 선수들은 개인사업자다. 특히 골프가 심하다. 테니스 선수는 최소한의 참가비와 호텔비 등을 지원받는다. 골프는 참가 선수 중 절반이 컷탈락으로 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며 여행 경비와 캐디피 등도 자신이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골프 선수들은 어떤 투어에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프리랜서 성격이 강하다. 타이거 우즈는 PGA 투어의 일정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일정에 투어를 맞췄다. 미국 투어든, 유럽 투어든, 일본 투어든 입맛에 맞게 골라 나갔다. 전인지도 어떤 투어에 나가야 할 의무는 없다. 전인지도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 투어 어디라도 원하면 다 나갈 수 있다. 출전권이 있다.

올해 US오픈에서 우승한 후 바로 LPGA 투어에 나가는 것이 유리했다. 상금 규모도 LPGA 투어가 크고, 내년 적응을 위해서라도 일찍 가는 게 낫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팬들과의 약속이 있다면서 하반기에도 주로 국내 투어에서 뛰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골프를 한 선수들은 주니어 시절 주위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다. 프로가 되어 성공 후에는 도움을 준 분들을 외면해서 서운해 하는 사람들도 더러 나온다. 전인지도 어려움을 겪으면서 골프를 했고 도움도 받았지만 “성공하고 나서 얼굴을 싹 바꿨다”고 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US오픈이라는 중요한 대회 기간 중에도 밤하늘 반딧불을 보면서 세상을 밝히겠다는 생각을 한 전인지라면 다를 것이다. 약속을 지키는 그의 결정을 존중한다.

박인비가 리디아 고와의 1위 경쟁이 뜨거운데도 약속을 지키려 지난 주 국내투어에 나온 것도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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