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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 칼럼-LPGA의 한국 선수와 미국 언론

성호준 기자2015.09.11 오전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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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골프장에서 프로 8명이 참가한 대회가 열렸다. 클럽 회원들끼리 겨루는 챔피언십을 앞두고 열리는 이벤트 대회 성격이어서 참가자도, 규모도 작았다. 12홀 골프장을 3번 도는 36홀 경기였다. 프로들의 참가 이유도 순수하지는 않았다. 다음날 열릴 아마추어들의 클럽 챔피언십에서 귀족들의 가방을 메고 캐디피를 벌려는 의도가 더 컸다고 골프 사학자들은 전한다.

8명이 나온 그 대회는 이후 디 오픈 챔피언십이 됐다. 초창기 우승자들은 메이저 대회의 개념이 무엇인지 상상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죽은 후 또 몇 십 년이 지나서 영문도 모른 채 메이저 우승자로 추앙됐다.

보비 존스나 벤 호건, 아널드 파머 등이 활동하던 시절에도 메이저, 혹은 그랜드슬램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 때 활동하던 선수 일부도 메이저가 무엇인지 모르고 어떤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나중에 메이저 우승자로 재조명됐다.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박인비가 슈퍼 커리어 그랜드 슬램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달 브리티시 여자 오픈에서 박인비가 4개 메이저 대회 우승을 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을 때 미국 주요 언론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논리는 이랬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모든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박인비는 LPGA 투어 5개의 메이저 중 4개만 우승했다. 고로 자격미달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LPGA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메이저 전부가 아니라 4개를 우승하는 것이므로 박인비의 그랜드슬램이 맞다고 반박했다.

양쪽 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앞에 썼듯 메이저와 그랜드슬램의 개념이 처음부터 딱 굳어진 것은 아니다. 아직 틀을 짜고 있는 과정인 여자 골프에서는 메이저대회나 그랜드슬램의 개념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박인비 그랜드슬램 논란 당시 기자는 그랜드슬램이 맞지만 LPGA가 남자 단체인 PGA 투어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박인비가 가능하면 마지막 메이저인 에비앙 챔피언십까지 우승해서 확실히 해 놓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다행히 분위기는 바뀌고 있다. 미국에서 박인비의 업적은 그랜드슬램이라는 여론이 나온다. 미국 골프위크의 설문 조사에는 322명이 참가해 70%인 233명이 그랜드슬램이 맞다고 답했다. 샘플수가 많지는 않지만 참고할만한 여론이다.

주요 언론도 전향적으로 바뀌었다. 뉴욕타임즈는 처음엔 그랜드슬램이 아니라는 AP의 기사를 그냥 실었다. 그러나 에비앙을 앞두고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인비가 슈퍼그랜드슬램이라고 칭하는 5개의 다른 메이저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박인비가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스포츠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ESPN도 그랜드슬램이라고 했다. 유력 매체가 인정했기 때문에 박인비의 그랜드슬램 논란은 이제 사그라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랜드슬램이 아니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매체는 AP통신과 미국 골프채널, 미국의 유명 골프 전문 잡지들이다. 전문 미디어여서 골프라는 스포츠에 대해서 지나치게 교조적으로 해석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골프 메이저 대회는 원래 4개인데 LPGA가 왜 5개로 늘렸냐라는 항의 같은 것이다. 박인비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LPGA 투어에 대한 항의다. 박인비는 중간에 끼어 희생양이 된 느낌이다.

만약 그랜드슬램이냐 아니냐는 논란의 주인공이 박인비가 아니라 미국 선수였다면 어땠을까. 자국 선수라고 해서 미국 골프 미디어가 그랜드슬램이라고 입을 모아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2000년에서 2001년에 걸친 타이거 우즈의 4개 메이저 연속 우승을 미국의 일부 미디어, 특히 방송 쪽에서 그랜드슬램으로 몰고 가려 했다. 그러나 미국 저널리스트들은 그게 옳지 않다고 반대해 관철시켰다. 흑인 타이거가 아니라 백인인 필 미켈슨이 그랬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 미디어는 세계 골프계를 주도하고 있다. 전쟁 통에 영국에서 몰락한 골프를 미국에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널드 파머 같은 뛰어난 스타들의 모습을 멋지게 알려 골프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골프는 매우 극단적인 멘탈 스포츠이기 때문에 기자가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상대적으로 넓다. 다른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뛰어난 저널리스트들이 골프로 유입된다. 스포츠의 정신과 정의, 평등 같은 것을 옹호하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쉽게 말해 아닌 것은 아니다고 말하는 양심이 있는 언론인들이다.

우리가 정말 기분 나빠해야 할 것은 그랜드슬램 논란이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여자 골프에 대해 보도하지 않는다. 박인비가 아니라 미국 선수였다면 많은 미디어가 이를 알리고 그랜드슬램이냐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서 토론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아마 결론은 ‘인비슬램’ 쯤으로 내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그들은 눈을 감았다.

골프 전문 매체가 더 하다. 여자 골프를 남자 골프의 10분의 1도 다루지 않는다. 그들에겐 섹시한 모델이 골프를 새로 배우고 있는 뉴스가 최근 14개 메이저대회에서 6승을 한 박인비의 업적에 비해 뉴스가치에 앞선다. 그랜드슬램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듯하다.

한국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낸 올해 미국 언론의 LPGA 투어 한국 선수에 대한 외면이 심화되고 있다. 김효주가 JTBC 파운더스컵에서 우승했을 때 미국 골프닷컴의 보도는 딱 두 단락이었다. ‘김효주가 우승했다. LPGA 5경기에서 한국 선수가 4승을 했다’였다. AP통신 기사를 갖다 썼는데 나머지 내용은 다 지우고 두 단락만 놔뒀다. 한국 선수들이 너무 많이 우승해서 보기 좋지 않다는 뉘앙스로 읽힌다.

반면 조던 스피스가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놓치고 그랜드슬램이 좌절되자 미국 미디어는 ‘아메리칸 슬램’ 이슈를 만들었다. 스피스가 미국에서 열리는 3개 메이저대회를 석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말을 잘도 만들어낸다. 미국 팬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다.

그러나 미국 미디어는 박인비를 비롯한 한국 선수들의 새로운 물결을 놓치고 있다. 한국 미디어에서 한국 선수들과 라이벌 관계인 스테이시 루이스를 조명할 수 있고, 일본의 최고 선수 마츠야마 히데키의 장점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 것도 멋지게 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 선수들이 발전할 수 있는 모델을 보여줄 수 있다.

미국 미디어에서도 박인비나 김효주, 김세영 등 한국의 스타들의 장점을 정확히 알려야 미국 여자 골프가 반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미국 미디어가 이를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 참에 한국 스포츠 저널리즘의 지나치게 폐쇄적인 민족주의도 뒤돌아 봤으면 좋겠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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