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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 칼럼-박인비의 셔터맨

성호준 기자2015.08.04 오전 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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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LPGA 시상식에서 올해의 선수상을 받는 박인비와 남기협씨[성호준]

박인비의 셔터맨,

결혼하기 전 그는 LPGA 투어에서 기자를 보면 도망 다녔다. 시간이 지나 안면이 있게 되어서는 눈인사를 하긴 했다. 그래도 사진을 찍자고 하면 또 냉큼 도망갔다. 한국에서 무슨 죄를 짓고 온 것은 아닌가, 혹은 박인비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서 얼굴이 찍히는 것이 불편한가라는 불온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박인비의 남편인 남기협씨 총각 때 얘기다.

박인비가 2013년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포피의 연못에 점프할 때 남씨의 사진을 처음 찍었다. 시간이 좀 지나 말을 섞게 되자 남씨는 피해다니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박인비라는 선수 뒤에 있는 사람이다. 선수가 드러나야지 내 얼굴을 알릴 이유가 없다”라고 했다. 맞는 얘기지만 좀 과하다고도 생각했다. KPGA 투어 프로 출신으로 실력은 검증된 사람인데, 박인비 뒤에 꼭 숨어 있는 것을 보면 혹시 셔터맨을 꿈꾸는 건 아닐까 추측도 했다.

남씨가 세계랭킹 1위라는 간판을 보고 박인비를 사랑한 것은 아니다. 박인비는 고등학교 때 로스엔젤리스의 골프 아카데미에서 남씨를 처음 만났다. 박인비는 LA에 살았고 남씨는 전지훈련 와서다. 남씨는 겸손하고 성품이 부드럽다. 모든 사람에게 다 친절했다. 박인비는 “그래도 나에게 조금 더 잘 해 주는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2006년 박인비가 2부 투어 뛸 때, 그러니까 아주 평범한 선수일 때 둘은 사귀기 시작했다. 당시 남씨는 국내 투어에서 활동했다. 둘 다 대회 참가로 바쁘니 1년에 3번 정도 밖에 볼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사귄 것은 2007년 경주에서 열린 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다.

박인비는 “오빠에게 캐디를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당시 오빠가 바쁜데도 선뜻 응해 주더라”고 했다. 그는 또 “당시 바람이 엄청 불고 경기 마지막 라운드가 취소되어 아주 복잡했는데 오빠가 있으니까 위로가 되더라”고 회고했다.

2013년 박인비의 그랜드슬램 도전을 취재하면서 셔터맨 남기협씨는 진짜 능력자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인비는 2011년까지 드라이버 공포증으로 고생했다. 심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골프를 그만두려고도 했다. 비디오샵을 운영하려고도 했단다.

골프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반대했다. 남씨도 골프 선수라는 직업이 얼마나 좋은지 떠나기 전에는 모른다고 조언했다. 그래도 남씨 성격상 박인비가 그만하겠다고 했다면 따랐을 것이다. 진짜 셔터맨이 될 뻔했다. 비디오샵은 사양산업군에 들어간다. 셔터맨도 오래는 못했을 것이다.

남기협씨가 박인비를 살렸다. 2011년 말부터 박인비의 스윙에 관여했다. 릴리스하는 방법을 바꿔줬다. 박인비는 “임팩트시 손목이 미리 릴리스되는 스타일이었는데 완전히 끌고 내려온 다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릴리스를 만들어줬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남씨가 박인비의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몇 년간 참은 것이다. 100타를 치는 사람도 틈만 나면 어드바이스하려 하는데 그는 매우 과묵했다.

박인비는 “드라이버 문제는 고등학교 졸업 후 5~6년 동안 몸에 밴 플레이 스타일이었고 당시 다른 선생님에게 배우던 터라 오빠가 지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빠가 한 3년간 지켜보다가 얘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금방 효과가 나타났다. 박인비는 티샷 정확도가 2012년 73%(45위)로 좋아졌다. 투어에 데뷔하던 2007년부터 2011년까지 페어웨이 적중률 부문에서 만년 하위권이었던 박인비다. 가장 잘 한 것이 84위, 가장 못했을 때는 142위였다. 박인비는 당시 “쇼트게임으로 파세이브에 급급하다가 티샷이 똑바로 가니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버디 기회가 많으니까 정말 편했다. 아직도 티샷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티잉그라운드에 올라가서 벌벌 떤 걸 생각하면 아주 만족한다”고 했다.

박인비는 ‘오빠’에게 배운 후 치면 언더파였다. 1년여 만에 랭킹 1위가 됐고 메이저 3연승을 했다. 좀 더 일찍 릴리스 문제를 고쳤다면 더 빨리 1위가 됐을 것 같다. 박인비는 “그래서 오빠한데 미리 좀 얘기해주지 그랬냐고 몇 번이나 투정을 했다”고 말했다. 과묵한 오빠 남씨는 그냥 웃었다.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올해 페어웨이 적중률과 그린 적중률이 2013년에 비해 3% 가량 올라갔다. 큰 차이다. 최정상급에서 종이 한 장 차이가 1등과 2등을 만든다. 그게 승자와 패자를 만든다. 3%라면 종이 50장 차이는 된다. 특히 그린적중률의 경우 2009년 138등에서 올해 4등으로 올랐다.

박인비가 이렇게 뛰어난 롱게임을 하는 대신 퍼트는 2013년만 못하다. 그러나 가끔 옛날 퍼트가 나온다. 그런 날엔 누구도 막기 어렵다. 고진영은 브리티시 여자 오픈에서 4라운드 막판까지 자신의 최고의 경기, 즉 A게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운이 나빴다. 정상급 롱게임에 신기의 퍼트를 가진 박인비의 A게임을 만난 것이 불운이었다. 그 A게임끼리의 기싸움에서 밀려 막판 실수가 나왔다고 본다.

남씨는 2008년 KPGA 선수권에서 8위에 오르기도 했다. 롱게임이 아주 좋은데 퍼트를 잘 못 했다. 특히 짧은 퍼트가 좋지 않아 우승을 몇 번 놓쳤다고 한다. 이에 대한 한이 많았을 것이다. 남씨가 박인비 뒤에 꼭꼭 숨어 있으려 했다. 선수가 돋보여야 한다는 생각과 더불어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과 아쉬움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과는 반대로 퍼트를 잘 하고 롱게임은 약한 박인비를 가르치면서 대리만족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박인비는 아주 예민한 편은 아니다. 비행기에서도 머리만 대면 잔다. 남씨는 예민하다. 그는 “누워 있다가 번쩍 생각이 나곤 한다. 이게 인비 스윙의 문제였다라고. 그래서 아침까지 잠을 못자고 멀뚱멀뚱 기다렸다가 연습장 가서 인비에게 얘기해주면 고쳐지곤 했다”고 했다.

“우리 둘은 워낙 호흡이 잘 맞아 한 마디만 하면 딱딱 알아듣는다” 그런 얘기를 할 때 남씨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남씨는 박인비가 땡볕에서 퍼트 연습을 할 때 우산을 씌워준다. 연습라운드 할 때 언덕을 만나면 당겨주고 밀어주고 한다. 박인비는 “아무리 경기에 집중해도 오빠는 보인다. 오빠는 경기 중 묵묵히 경기를 보다가 잘 할 때 박수만 쳐 준다. 매번 보는 것이지만 그 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했다.

예전엔 이를 본 선수들이 꼴불견이라고 했다. 지금은 아니다. 다들 부러워한다. 기술적으로, 또 심리적 안정감에서 박인비는 동료들에 비해 확실히 유리하다. LPGA 한국 선수 중 일부는 “나도 그런 남편이 있으면 메이저 몇 승은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농담만은 아니다.

박인비의 아버지 박건규씨는 “인비가 힘들었을 때 옆에 있어줬고 잘 치게 샷을 잡아주고 마음도 잡아줬다. 인비는 사위의 말은 다 믿는다. 믿음을 가지고 치니까 잘 되는 것 같다. 우리 딸 세계 랭킹 1위는 부모보다는 사위가 만들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일곱살이다. 또 박인비는 랭킹 1위다. 돈도 많이 번다. 박인비는 “그래도 투어에 있는 친구들은 다 오빠 편이다. 다 오빠가 아깝다고 하더라”고 했다.

한국에서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나온다. 한국 코치들의 수준이 올라가서다. 더 이상 미국 잡지들이 선정하는 100대 코치 등에 주눅 들고 끌려 다닐 필요는 없다. 전인지를 키운 박원 JTBC 해설위원, 김효주를 길러낸 한연희 전 국가대표 감독 등은 세계적인 코치라고 본다. 박인비의 셔터맨 남기협씨도 훌륭한 선생님이다. 적어도 부인에 대해서는 누구 보다 뛰어난 코치다.

박인비의 그랜드슬램은 의미가 깊다. 테니스 4대 메이저에서 우승하는 것처럼 다양한 코스에서 이겼다는 의미다. 클레이 코트나 잔디 코트처럼 특정 코트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모든 코트에서 강하다는 뜻이다. 골프 여자 메이저대회가 남자 메이저대회처럼 개성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브리티시 오픈은 미국 대회와 다르다. 링크스에서는 자연과 싸우고, 혹은 대화해야 한다. 때론 불운도 이겨내는 정신력이 필요하다.

메이저 다승자라도 타이거 우즈는 그랜드슬램을 했고 필 미켈슨은 못했다. 잭 니클러스는 했고 아널드 파머는 못했다. 클래스의 차이가 있다.

박인비의 셔터맨은 자신이 그랜드슬램을 한 것 이상으로 뿌듯할 거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고 미디어를 피해 도망 다닐 테지만 안 봐도 안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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