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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 칼럼-보미 아버지의 꿈, 딸의 약속

성호준 기자2016.07.05 오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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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미 아버지는 딸과 올림픽에 함께 가겠다는 희망에 덩실덩실 춤을 췄다.

설악산 백담사 인근 한계리 계곡에 갔다가 골프 유망주를 만난 적이 있다. 얼굴은 새까맣게 탔는데 눈은 퀭하니 큰 여중생 이보미였다. 강원도 인제의 깊은 산골소녀여서 그런지 순진한데다 아버지를 닮아 타고난 심성이 선했다. 이보미가 중학생 때니까 10년도 더 된 얘기다.

이보미는 부모 몰래 태권도를 한 달 배우다가 1998년 박세리의 US여자오픈 우승 소식에 골프를 시작했다. 이보미도 원조 세리 키즈다. 그의 아버지 이석주(작고)씨는 다른 세리 키즈 부모들과는 달랐다. 소탈했다. 어떻게 해서든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크지 않았다. 딸에게 성공을 위한 지름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골프를 잘 몰라서 지름길을 몰랐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씨는 “그냥 연습장에서 열심히 하면 되는 걸로 알았다”고 했다. 이보미는 인제의 한 연습장에서 오래 돼 그립이 닳고 닳아 미끈미끈한 대여용 성인 클럽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골프를 하게 된 후엔 아버지가 모는 엑셀 승용차를 타고 매일 두 번씩 설악산 미시령을 넘어 속초에 갔다. 그 때는 미시령 터널이 없었다. 산을 넘는 데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속초는 큰 도시다. 제대로 된 연습장은 물론, 골프장도 있었다(김경태·노승열 등이 속초 출신이다). 그러나 이보미가 라운드를 하기에는 벅찼다. 아버지 이씨는 “비싼 그린피를 댈 돈도 없었고 골프장 사람들에게 공짜로 혹은 싸게 해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할 성격도 아니었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이 실전 라운드를 할 때 보미는 모래를 넣은 군용 더플 백을 치면서 임팩트 연습을 했다. 이보미가 볼스트라이킹이 매우 좋은 이유이기도 하고 실전 경험이 부족해 퍼트 때문에 고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회에 나가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가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골프를 가르칠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숙박비를 아끼려고 경기 당일 새벽 집을 나왔다. 연습 라운드 같은 건 욕심도 못 냈다. 시골에 살아 정보도 부족했다. 성적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보미가 1988년생이 아니었다면 사정은 좀 나았을 거다. 박세리 열풍 때문에 골프를 하는 88년생 여학생 중에는 유난히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 박인비, 신지애, 김송희, 김인경, 이일희, 김하늘 등이 모두 88년생 용띠다. 최나연도 프로가 되기 전까지는 88년생과 어울렸다.

이보미는 88년생 중 엘리트 그룹에 끼지 못했다. 그는 “어릴 적 동기들은 정말 실력이 좋았다. 옷도 멋지게 입고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공을 치는 아이들 같았다. 실력 차가 커서 친해질 기회도 별로 없었다”고 했다.

88년생 아이들은 본인 실력도 뛰어났지만 아버지들의 열성이 워낙 컸다. 스윙이론에 정통했고 멘탈 코칭 및 영양 등 골프 유관분야에도 전문가 수준이었다. 딸들 성적에 대한 경쟁심도 컸다. 한국 여자 골프가 발전한 것은 이렇게 헌신적인 골프대디 덕도 크다. 이보미는 “나도 지원을 좀 더 잘 받았다면 잘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그냥 잘하라’고만 하는 부모님이 야속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석주씨는 골프대디로서 딱 유능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딸을 사랑했고 닦달하지 않았다. 짐을 지우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미시령 구 도로로 설악산을 넘을 때처럼 그는 버디 하나, 보기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골프 선수 부녀 관계와는 달리 딸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다. 이보미는 아버지를 무척 따랐다.

이보미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성적이 좋아졌지만 잘 나가는 동기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최나연은 고등학교 1학년 때 KLPGA 투어에서 2승을 거뒀다. 신지애도 고등학교 2학년 때 프로에서 우승했고, 고3 때는 이미 KLPGA 투어에서 ‘지존’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박인비와 김인경, 김송희 등은 세계를 제패하겠다면서 일찌감치 미국으로 떠났다.

이보미는 스물 한 살이던 2009년에야 KLPGA 1부 투어에 입문했다. 최나연에 비해 5년이 늦었다.

여자프로골프 선수들이 20대가 되면 대개 아버지와 멀어진다. 이보미는 반대로 아버지와 더욱 더 가까워졌다.

2014년 9월 일본 메이저대회인 일본여자프로골프선수권 2라운드까지 이보미는 공동 6위로 우승 기회를 잡았다. 3라운드 경기 도중 이보미는 갑자기 그린에서 볼을 집어 들고 경기장을 떠났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보미는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이석주씨는 병상에서 딸이 일본 상금왕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이보미는 지난해 일본 투어에서 상금왕을 했다.

이보미의 아버지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또 있다. 2009년 골프가 올림픽에 들어가게 됐다는 소식이 나왔을 때 이석주씨는 덩실덩실 춤을 췄다. 딸과 올림픽에 함께 갈 수 있겠다고 하면서다. 이보미의 에이전트인 이주원씨는 “주니어 시절 이보미가 국제대회나 아시안게임에 못나간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그래서 올림픽 소식에 즐거워한 것”이라고 했다.

골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확정된 2009년 이보미는 KLPGA 상금 순위 5위였다. LPGA에서 뛰는 선수도 많기 때문에 그 때 기준으로 보면 올림픽에 가기 어려운 성적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현재 이보미는 세계 랭킹 14위다. 88년생 중 박인비 다음으로 세계랭킹이 높다. 박인비는 부상 때문에 올림픽에는 못 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한국여자골프의 황금세대인 88년생 중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선수는 이보미가 유일하다. 이보미는 올림픽 출전을 위한 포인트를 따기 위해 US오픈에 나갔다.

1988년은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린 해다. 이 88둥이들이 올해 한국의 리우 올림픽의 주력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한국 스포츠 중 국제 경쟁력이 가장 강하다는 여자골프에서 88년생의 열정이 예전만큼은 아닌 듯싶다. 박인비가 아픈 현재로서는 이보미가 88년생 중 가장 앞에 있다. 주니어 시절엔 산골소녀 이보미가 그 화려한 동기 중 가장 앞에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되돌아 보면 골프 대디로서 유능하지 않아보였지만 느긋한 지원을 한 이보미의 아버지가 어쩌면 가장 현명했는지도 모른다. 이보미는 비교적 스트레스 없는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냈고 롱런할 수 있었다.

US오픈에서 이보미의 건투를 빈다. 이보미에게 올림픽은 지카 바이러스 같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가의 문제다. 하늘의 아버지와 초록색 필드에서 다시 만나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느냐의 문제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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