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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 칼럼-장하나와 전인지의 조 편성 게임

성호준 기자2016.06.07 오전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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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지, 장하나

남자 메이저대회들의 조 편성은 재미있다. 특히 US오픈이 그렇다. 주최측은 창의력을 발휘하여 1, 2라운드 선수들을 묶는다. 비슷한 이름의 선수들, 이전에 이런 저런 사연이 얽힌 선수들, 장타를 치는 선수들, 여성 팬에게 인기가 좋은 잘 생긴 선수들, 같은 대회에서 우승 경력이 있는 선수 등 여러 공통점을 찾아 조 편성을 한다. 한국 선수 세 명을 묶은 적도 있고 타이거 우즈와 리 웨스트우드, 톰 왓슨의 W자로 시작되는 성을 쓰는 선수들을 모으기도 했다.

메이저대회의 조 편성에는 이런 유머가 있다.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다. 명예롭지 못한 조합도 있다. 조직위는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하지 않은 선수 중 최고 선수를 모은다(큰 경기에서 힘을 못 쓰는 선수라는 의미로 칭찬은 아니다). 선수들은 이런 짓궂은 조 편성을 감내하고 이겨내야 한다.

메이저대회의 조 편성 놀이가 좀 지나친 경우도 있다. US오픈을 주최하는 USGA는 투병 경력의 선수를 한 조로 묶었다가 비난을 들은 적도 있고 뚱뚱한 선수들을 한 조에 모아 항의를 받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선수들을 한 조에 몰아넣는 것도 전통이다.

US오픈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디 오픈, 마스터스, PGA 챔피언십 등 다른 메이저대회도 이야기 거리가 되는 조 편성을 한다. 정확한 기준은 밝히지 않지만 시청자를 위해, 또 팬들의 관심을 위해, 그러니까 흥행을 위해 그런 조 편성을 한다.

남자 메이저대회 PGA 챔피언십을 여는 PGA는 지난해부터 여자 메이저대회도 운영하고 있다. LPGA 챔피언십의 이름을 여자 PGA 챔피언십으로 바꿨다. PGA가 대회를 주최하게 되면서 상금도 350만 달러로 늘렸고 대회장도 명문 코스로 바뀌었다.

그러나 얄궂은 조 편성표도 가지고 왔다. 장하나는 복귀전이 될 KPMG 여자 PGA 챔피언십 1, 2라운드에서 전인지와 한 조에서 경기하게 됐다. 싱가포르 공항에서 일어난 부상 사건 때문에 서먹한 두 선수를 한 조에 묶은 조 편성표는 상당히 잔인해 보인다. 장하나 측에서는 싱가포르 사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고통을 겪었다고 했는데 하필 복귀전에서 전인지와 만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전인지로서도 매우 부담스러울 것이다.

PGA가 둘을 일부러 한 조에 묶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세계랭킹 10위 이내 두 거물 선수를 방송조도 아닌 곳에 모아 놓은 것을 보면 우연인 것 같지도 않다. 장하나와 전인지의 사건은 미국 골프계에도 ‘러기지(가방) 게이트’로 소개되어 다들 알고 있다. 이번 조 편성으로 다시 한 번 환기됐다.

선수들에게 동반자가 누구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지난해 디 오픈 챔피언십은 조던 스피스와 더스틴 존슨을 함께 경기하게 했다. 존슨은 직전 메이저대회인 US오픈 마지막 홀에서 3퍼트를 하면서 스피스에게 우승을 넘겨준 악연이 있다. 존슨이 조 편성표를 받았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적도 좋지 않았다.

장하나도 올 시즌 껄끄러운 조 편성 때문에 피해를 본 일이 있다. 지난 4월 스윙잉 스커츠 클래식 1라운드에서 동반자가 렉시 톰슨이었다. 톰슨의 캐디는 3월 기아 클래식 도중 장하나가 룰을 위반했다고 신고한 적이 있다. 경기위원회는 장하나가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명확한 증거가 없을 때 위원회는 해당 선수의 말을 존중해서 결정한다. 그래도 장하나는 톰슨과의 동반 라운드 중 기권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다.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의 조편성은 상당히 짓궂다. 주최측은 일단 조 편성으로 팬들의 관심을 끌 흥행 코드를 만들었다. 결과는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두 선수가 기 싸움을 벌여 사이가 더 나빠질 수도 있고 동반 라운드를 하면서 화해의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동반자의 영향 때문에 성적이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PGA로서는 두 가지 모두 흥행에 나쁠 게 없다.

조 편성 게임은 장하나-전인지의 게임이기도 하지만 (장하나+전인지)와 PGA의 게임이기도 하다. PGA의 충격적인 조 편성 발표는 두 선수에 대한 강력한 서브다. 이제 두 선수가 받아넘길 차례다.

장하나와 전인지 모두 “지나간 일”이라고 했지만 속마음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껄끄러운 상대를 앞에 두고 골프계 전체가 지켜볼 힘겨운 라운드를 해야 한다. 헤쳐 나갈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남자 골프 세계 랭킹 5위 이내 선수들은 같은 랭킹 5위 이내 선수들과 한 조로 경기할 때 성적이 더 좋았다. 야구 투수들은 강타자들을 만나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평소보다 약간 더 빠른 공을 던진다고 한다.

무엇 보다 마음이다. 이런 부담스러운 상황을 겪는 것은 위기이자 기회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겨낸다면 한 단계 더 큰 선수가 될 것이다. 이번 부담스러운 라운드를 통해 마음 속 커다란 파도에도 요동치지 않는 배를 만드는 것이다.

두 선수 모두 멋지게 이겨내고 싱가포르 가방사건을 결국 해피앤딩으로 끝냈으면 한다. 장하나의 화끈한 우승 세리머니도, 전인지의 챔피언 트로피 미소도 다시 보고 싶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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