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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 칼럼-스포츠의 저주

성호준 기자2016.05.06 오전 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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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첫 우승을 앞두고 우승을 못할 거라는 저주를 받은 신지은은 4년 3개월 만에 이를 풀었다. 신지은이 들고 있는 우승트로피의 말발굽은 미국에서 행운의 부적으로 여겨진다.

2012년 2월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LPGA 투어 HSBC 위민스 챔피언스 최종라운드에서 신지은(미국 이름 제니 신)은 한 홀을 남기고 한 타 차 선두였다. 4라운드 3타를 줄인 상승세였기 때문에 신지은의 우승이 유력해 보였다.

예쁜 2년 차 선수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완성될 무렵, 저주가 시작된다.

18번 홀에서 신지은이 티샷을 준비할 때 “제니, 너는 우승 못할 거야”라는 외침이 들렸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냥 소리를 질렀다. 신지은은 “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싸늘한 얘기였다”고 했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곧바로 경기 중단 사이렌이 울렸다. 천둥 번개 때문에 경기가 한 시간 반 중단됐다.

신지은은 “기다리는 동안 그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고 경기가 재개돼 티샷을 할 때 너무나 긴장했다”고 말했다. 신지은은 마지막 홀에서 더블보기를 하면서 우승을 놓쳤다.

그는 “(누구에게 원한 살 일도 없었는데) 왜 그런 저주가 나왔는지 미스터리”라면서 “오히려 좋은 경험으로 만들고 싶다. 다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게 쉽지 않았다. 최근 텍사스 슛아웃에서 우승을 할 때까지 4년 3개월이 걸렸다.

스포츠에는 저주가 많이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것이 미국프로야구 보스턴 레드삭스의 밤비노의 저주, 시카고 컵스의 염소의 저주다. 축구에서도 펠레의 저주, 골프에서는 US오픈의 저주, 마스터스 파 3 콘테스트의 저주 등이 있다.

가장 그럴듯한 저주는 호주 축구 대표팀 얘기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을 치르러 모잠비크에 간 호주 선수들 중 일부가 주술사를 찾아가 경기 결과를 예언해달라고 했다. 주술사는 골대 근처에 뼈를 묻고 상대를 저주했다. 호주는 짐바브웨에 3-1로 이겼다.

그러나 선수들은 주술사에게 약속한 1000파운드를 주지 않았다. 화가 난 주술사는 반대로 호주 축구팀에 저주를 퍼부었다. 호주는 이스라엘에게 패해 월드컵에 가지 못했다. 이후 호주는 월드컵에서 고행을 해야 했다. 1974년 월드컵에 나가기는 했지만 한 골도 넣지 못했고, 이후 32년 동안 월드컵 잔디를 밟지 못했다.

2004년 호주의 한 TV 프로그램이 이 저주를 풀려 시도했다. 방송팀은 모잠비크에 가서 또 다른 주술사를 고용해 저주를 없애는 주술을 했다. 효과가 있었다. 2006년 호주는 월드컵에 나갔을 뿐만 아니라 16강에도 진출했다. 2010년과 2014년에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저주를 없앤 후 100% 월드컵에 진출 한 것이다.

그럴듯하긴 해도 저주는 실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만들어낸 얘기일 뿐이다. 꼼꼼히 따져 보면 말도 안 되는 것투성이다. 가장 뛰어난 선수를 라이벌 팀에 팔아 생긴 밤비노의 저주라면 몰라도 염소를 입장시키지 않아 우승을 못했다는 저주는 이상하다. 일반적으로 야구장에는 염소같은 가축을 입장시키지 않는다.

골프에서 가장 유명한 마스터스 파 3 콘테스트의 저주도 통계적으로 봤을 때 신비한 것은 아니다. 마스터스 출전 선수가 100명 정도이기 때문에 파 3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선수가 본 대회에서 우승할 산술적 확률은 1% 정도다. 56년 동안 파 3 콘테스트 우승자가 그린재킷을 입지 못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그린재킷을 노리는 진지한 선수들은 본 대회에 집중하려 파 3 콘테스트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아예 나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마스터스에 처음 나온 풋내기 선수나 우승 가능성이 거의 없는 노장들이 파3 콘테스트에서라도 한 건을 하려고 눈에 불을 켠다.

저주가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스포츠에서 저주 얘기는 많고 앞으로도 더 나올 것이다. 그 이야기들이 스포츠를 풍성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기자도 어릴 때 밤비노의 저주 이야기를 듣고 레드삭스의 불행에 연민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불쌍한 레드삭스를 응원하고 양키스를 미워했다. 스포츠의 저주 이야기는 어린이들이 해리 포터에 환상을 갖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저주가 현실이 되기도 한다. 그건 선수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본인이 저주를 믿게 되면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극단적인 멘탈 스포츠인 골프에서 그렇다. 골프 선수들은 놀라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다. 한 라운드가 끝나면 모든 샷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어니 엘스는 “내가 우승한 메이저대회(4번)에서 한 모든 샷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골프선수들의 이 기억력은 축복이면서도 저주가 될 수 있다. 특히 나쁜 기억은 더 강렬하다. 중요한 순간 뇌에 더욱 더 각인된다.

신지은은 텍사스 슛아웃에서 우승 경쟁을 할 때 4년 전 싱가포르 저주의 환청이 들렸을 것이다.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그 저주가 그를 휘감고 있었을 것이다. 신지은은 멋지게 이겨냈다.

신지은의 싱가포르 저주 이야기는 억지로 끼워 만든 듯한 다른 저주보다 구체적이다. 우승 직전 마지막 홀에 나온 저주, 경기 중단 사이렌과 천둥번개, 한 시간 반 공포 속의 기다림 등 드라마틱한 요소가 널렸다.

그런 저주를 4년 만에 지워버린 건 높이 살만하다. 밤비노의 저주는 86년만에 깼고, 염소의 저주는 아직도 풀지 못했다.

신지은이 치켜든 우승트로피에 말발굽이 있는 것도 흥미롭다. 말발굽은 미국에서 행운의 부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신지은이 저주를 풀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저주에 갇히기엔 너무 뛰어난 선수였고 저주에 지지 않으려는 용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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