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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본 후 골프를 알다-양희영 혼다 우승

성호준 기자2015.03.01 오후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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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모(51)씨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카누 선수였다. 장선희(51)씨는 86아시안게임 창던지기 동메달리스트다. 두 사람은 땀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라는 대사를 앞둔 80년대 태릉선수촌의 국가대표 선수들의 훈련양은 엄청났다. 두 사람은 그 중에서도 돋보였다. 종목은 달랐지만 서로의 성실성에 매력을 느꼈다. 올림픽 직후 결혼했고 89년 첫 딸 희영(26)을 얻었다. 두 사람은 딸에게도 성실성을 가르쳤다.

양희영은 부모님의 철학을 잘 따랐다. 골프를 했고 중학교 3학년 때 운동 여건이 좋은 호주로 건너갔다. 양희영은 일개미 같았다. 퍼트 연습을 할 때는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허리를 펴지 않고 퍼트를 했다. 그래서 그의 티셔츠 등 부분이 볕에 누렇게 바래기도 했다. 연습장에서 공을 칠 때도 양희영은 기계처럼 샷을 했다. 쓰러지지 않는 터미네이터였다.

양희영은 2006년 호주에서 열린 호주레이디스마스터스에서 우승했다. 당시 나이가 같은 미셸 위에 비교되면서 남반구의 미셸 위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셸 위를 라이벌 전자회사 소니에 빼앗긴 삼성전자의 후원을 받았다.

LPGA에 들어와서는 달랐다. 성실성은 변하지 않았는데 오랫동안 우승컵에 입을 맞추지는 못했다. 영광은 투어 6년 만에 찾아왔다. 2013년 10월 한국에서 열린 하나외환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양희영의 고생이 끝난 듯 했다. 그런데 지난해 LPGA 투어에서 “양희영이 연습을 안 한다”는 소문이 났다. 다들 놀랐다. 선수들은 LPGA 투어 최고의 일개미가 배짱이가 됐을 리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 양희영은 연습량은 확 줄었다. 양희영이 부모님에게 “나 오늘 경기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고 돌어 와도 놀라지 마세요”라고 하기도 했다. 그냥 헛소문만은 아니었다.

우승 후 배가 불러서가 아니다. 양희영은 우승 후 더 허전했다고 한다. LPGA 투어의 친구들에게 “그동안 누구를 위해서 골프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의 고모 양연모씨는 “우승했는데 스폰서가 사라진 탓도 있다”고 말했다. “스폰서에 대한 의무가 없으니 나도 십몇년 만에 한 번 좀 쉬어보자”고 했단다. 11월초 일찌감치 시즌을 중단했다.

그래 봐야 한 달 쉰 것이지만 땀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양희영의 가족에겐 엄청난 사건이었다.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 파장이 컸다. 올 시즌 양희영은 다른 선수가 됐다. 개막전에서 5위를 했고 세 번째 경기인 호주여자오픈에서는 2위를 했다.

1일 태국 파타야 인근 시암 골프장 올드코스에서 벌어진 혼다 LPGA 타일랜드 최종라운드에서 양희영은 스테이시 루이스에 한 타 차 2위로 경기를 시작했다. 10번 홀까지 버디만 4개를 잡으면서 2타 차 선두로 올라섰다.

파 4인 14번 홀에서 위기를 맞았다. 숲과 벙커에 빠지면서 4번 만에 그린에 올라왔다. 더블보기 위기였다. 스테이시 루이스는 버디를 넣었다. 흐름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나 양희영은 애매한 내리막 퍼트를 넣어 대형사고를 막았다.

다음 홀에서도 양희영은 평온했다. 두 번째 샷을 핀 1m 이내에 붙였다. 그러자 루이스가 긴장한 듯 80야드에서 두 번째 샷을 그린을 확 넘겼다. 루이스는 평정심을 찾지 못했다. 그린 뒤에서 세 번만에 그린에 올라와 더블보기였다. 양희영은 버디를 잡아 3타 차 선두가 됐다.

16번 홀에서 양희영은 보기를 했고, 17번 홀에서도 위기를 맞았지만 약 2.5m의 파 퍼트를 성공시키면서 사실상 승부를 갈랐다.

과거 양희영은 우승을 앞두고 긴장을 했다. 그래서 준우승을 6번이나 했다. 잠시 배짱이 생활을 한 후 양희영은 여유가 있었다. 이날 퍼트가 들어가기도 하고 들어가지 않기도 했지만 예전처럼 다음 샷에서 몸이 얼어붙지 않았다. 지난 주 리디아고와 벌여 패한 것에 좌절하지 않았다. 이번 대회에서 스테이시 루이스라는 강적에게 역전승했다. 최종합계 15언더파였다.

양희영은 "내가 골프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대회에 빠지면서 쉬어보니 골프를 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이제 양희영은 80년대 국가대표 선수생활을 한 부모님의 골프가 아니라 자신의 골프를 하는 것이다.

이미림과 청야니, 루이스가 13언더파 공동 2위다. 신인 김세영은 7타를 줄여 12언더파 공동 5위다. 박인비도 7타를 줄여 11언더파 공동 7위다. 데뷔전을 치른 김효주는 7언더파 공동 23위로 경기를 마쳤다.

한국과 한국계 선수들은 올해 열린 LPGA 투어 4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다.

성호준 기자

kar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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