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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 칼럼-선수의 상처

성호준 기자2016.04.10 오전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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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야 주타누간은 2013년에 이어 또 한 번 가슴 쓰라린 역전패를 경험했다. [골프파일]

스포츠 기자를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대통령배 고교야구 대회 기간 중 한 학부형에게 전화를 받았다. 전날 실책을 했다고 기사에 언급된 선수의 아버지였다. 그는 “굳이 실수한 아이의 이름까지 썼어야 했느냐”고 아쉬워했다. 뒤통수를 맞은 듯 아팠다. 나의 생각이 짧았다.

이후 아마추어 경기에서 실수한 선수의 이름은 쓰지 않았다. 프로 경기는 좀 다르다. 프로페셔널로 나선 이상 경기장에서 일어난 승리도 패배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리드를 날린 마무리 투수는 패전투수로 기록되고 승리가 걸린 페널티킥을 넣지 못한 축구 선수는 비난 받는다. 프로 스포츠는 일종의 전쟁터고 그런 게 싫다면 아마추어로 남아야 한다.

멘털 스포츠인 골프에서는 유난히 가슴 쓰라린 패배의 기록이 많다. 어떤 메이저대회는 승자 보다는 오히려 패자가 더 기억된다.

1996년 마스터스에서 6타 차 선두로 출발했다가 역전패한 그렉 노먼은 20년이 지난 올해도 어김없이 이름이 거론된다. 1999년 디 오픈에서 마지막 홀 트리플 보기로 우승을 날린 장 방드 벨드도 그 대회 우승자 폴 로리 보다 훨씬 유명하다. 메이저대회는 압박감이 일반 대회에 비해 훨씬 크고 그만큼 패자의 고통도 크다.

2012년 LPGA 투어 메이저대회인 ANA 인스피레이션에서 서희경은 3타 차 선두였다가 마지막 4홀 연속 보기를 하면서 우승을 넘겨줬다. 그 우승컵을 받은 것 같았던 김인경은 30cm 정도의 퍼트를 넣지 못해 포피의 호수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 대회에서 올해 또 사건이 생겼다. 태국의 아리야 주타누간이 우승을 눈앞에 뒀다가 마지막 3개 홀 연속 보기를 하면서 리디아 고에 역전패했다. 주타누간은 “좋은 경험이 됐다”고 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다. 가슴에 남은 상처는 오래 간다. 그렉 노먼도, 장 방드 벨드도, 서희경도, 김인경도 아직 그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마스터스 첫홀 60cm에서 6퍼트를 한 어니 엘스는 “머리 속에 뱀이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주타누간은 2013년에 이미 이런 일을 겪었다. LPGA 투어 혼다 타일랜드 마지막 홀에 들어섰을 때 두 타 차 선두였다. 18번 홀은 파 5였다. 보기를 해도 우승인데 장타를 때리는 주타누간에게 파는 식은 죽 먹기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타누간은 홈팬들에게 뭔가 보여주겠다며 이글을 하려다 트리플 보기를 하고 펑펑 울었다.

기자가 고교야구 선수 학부형의 전화를 받은 건 추신수(34)가 부산고 선수로 우승하던 1999년이었으니까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그 학부형의 슬픈 목소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이가 상처를 받았을 것 같아 죄책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기자가 성인이 되어서 생긴 일이지만 생각보다 이 상처는 오래 간다.

2013년 역전패할 때 주타누간의 나이는 17살이었다. 딱 그 고교 야구 선수 나이였을 것이다. 어른들도 감내하기 어려운 대역전패의 아픔을 소녀가 3년간 지고 살았다. 그리고 이번에 메이저대회에서 더 큰 상처를 안게 됐다.

3년 전 LPGA 대회에 주타누간이 참가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경험은 적을지 몰라도 상처가 없어서 훨씬 더 전도유망한 선수가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미셸 위가 기대만큼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어릴 적 남자 대회 등에 나가서 받은 상처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한다.

요즘 선수들은 일찍 프로로 전향한다. 프로 선수는 힘겨운 직업이다. 돈을 많이 벌기도 하지만 그 만큼 책임도 무겁다. 공만 잘 친다고 프로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프로라는 전쟁터에 나갈 정도로 마음이 여물었는지도 봐야 한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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