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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 컬럼 LPGA의 비틀즈

성호준 기자2015.05.05 오후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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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or 성두현)

2014년은 영국 록밴드의 미국 정복을 뜻하는 ‘British Invasion’의 50년이 되는 해였다. 1964년 2월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에 내린 비틀즈는 두 달 후인 4월 4일 빌보드 싱글차트 1위부터 5위까지를 자신의 곡으로 도배했다. 차트 100위 안에 비틀즈의 곡 12개가 들어갔다. 1964년 비틀즈는 미국 전체 음반 판매량의 60%를 차지했다. 이후 다른 영국 밴드들이 미국을 지배했다. 지난해 브리티시 인베이전 50년을 기념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제공=gettyimages)


2015년은 LPGA 투어의 제 2차 Korean Invasion으로 기록될 수 있다. 비틀즈로 시작된 브리티시 인베이전 비슷한, 놀랄만한 숫자가 나온다. 아직 시즌 초반인데도 “올해 LPGA 투어 신인들은 역대 기록을 모두 갈아치우고 있다”는 찬사가 이어진다. 4일 끝난 LPGA 투어 노스텍사스 슛아웃까지 11개 대회에서 한국 선수의 우승은 64%인 7개였다. 한국에서 태어난 뉴질랜드 선수 리디아 고를 포함하면 82%다. 상금 순위 상위 12명 중 한국 선수는 7명이다. 리디아 고를 더하면 8명이다.

세계랭킹 상위 10위 중 4명, 톱 100위 중 35명, 톱 200 중 67명을 차지하고 있다. 더 많아질 것이다.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 9위 미셸 위(미국) 등 교포 선수들을 포함하면 비중은 더 커진다. 미국 선수들은 톱 100위 안에 19명이고 일본은 14명이다. 여자 골프를 호령했던 두 나라를 합쳐도(33) 한국 선수 수(35)에 못 미친다. 특히 일본은 이제 한국과 상대가 안 된다. 일본 최고 랭커인 요코미네 사쿠라(52위) 보다 랭킹이 높은 한국 선수는 22명이나 된다.

첫 번째 Korean Invasion은 2000년대 초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선수 40여명이 LPGA에서 뛰었다.

올해 한국 선수의 놀랄만한 활약은 황금세대 김효주, 김세영, 장하나, 백규정 등이 동시에 미국으로 건너간 덕이 크다. LPGA 투어의 침체로 국내에 머물러 있던 유망주들이 LPGA 투어 부활과 함께 미국으로 가 박인비, 최나연 등 언니들과 합류한 것이다. 한국에서 나고 뉴질랜드에서 자란 또 하나의 천재 리디아 고도 2년차에 접어들어 기량이 만개했다.

기반을 닦은 선수는 박인비다. 그는 2013년부터 골프는 공을 멀리 치는 게임이 아니라 멘탈 게임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면서 세계 정상에 올랐다. 그 덕에 한국 선수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됐다. 새로 합류한 김세영, 장하나 등은 거리에서 서양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다.


(제공=gettyimages)


특히 김효주와 김세영의 활약이 눈부시다. 처음 나간 메이저대회(지난해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메이저 최저타 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김효주는 LPGA 회원으로 3개 대회만에 우승했다. 세계랭킹 4위이며 평균 타수 2위다. 김효주는 “LPGA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라고 말했다. 신인상 포인트 1위인 김세영은 올해의 선수상의 주요 후보이기도 하다.

록음악의 영국 침공은 역설적인 부분이 있다. 영국 젊은이들은 2차대전 후인 1950년대 미국의 록앤롤에 환호하고 이를 모방하려 했다. 잘 안됐다. 이후 영국 밴드들은 미국과 영국의 여러 가지 음악 스타일을 혼합해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독특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게 미국에서, 전세계에서 통했다.

한국의 여자 골프도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건너왔지만 영국의 록음악처럼 개성있는 스타일을 만들었고 가장 경쟁력이 뛰어난 상품으로 발전했다. 한국 여자 프로골프 선수들의 스윙은 가장 완벽하다. 일찌감치 에티켓과 언어 등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치밀하게 준비한다. 10대 후반에 프로로 전향해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한국 선수들은 이제 여자프로골프의 표준이 됐고 롤모델이 됐다.

침공은 저항을 낳는다. 비틀즈가 미국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환영관중 1만명이 공항에 나왔다. 이틀 후 비틀즈가 출연한 쇼 프로그램을 시청한 사람이 7500만명이나 됐다. 그러나 미국의 음악계는 외국 문화 유입에 강력히 저항했다. 특히 경쟁력이 약해 직장을 잃게 된 음악가들은 영국 밴드를 맹비난했다.

LPGA 투어에서도 그런 분위기는 나온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루키 군단, 특히 한국선수들이 주축이 된 루키들은 LPGA 투어를 완전히 흔들고 있고 많은 선수들이 침공에 자리를 잃고 있다. 지난해 상금랭킹 10위 이내 선수 중 현재까지 상금 10위 내에 머문 선수는 리디아 고, 박인비, 스테이시 루이스 뿐이다. 수잔 페테르센, 렉시 톰슨, 카리 웹, 미셸 위 등이 크게 물러섰다. 무명 선수들의 피해는 더 크다. 시드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선수들이 대거 미국으로 건너갈 때 적대감이 컸다. 실력 있는 한국 선수들 때문에 LPGA의 고인 물이 투어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호주 출신의 LPGA 투어 선수였던 얀 스티븐슨은 “아시아 선수들이 투어를 죽일 것”이라고 했다. 당시 한국선수들은 그런 기득권층의 저항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바늘방석에서 경기했다.

2008년엔 한국 선수를 타깃으로 영어 시험을 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미국 언론은 이를 맹비난했는데 놀랍게도 한국 선수들은 영어를 못하면 퇴출이 아니라 벌금을 내는 정도로 하자고 정책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국 선수들은 침공자가 아니라 이방인이었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돈만 벌어가는 선수라는 눈총을 이기기 어려웠다. 한국 선수들은 다른 한국선수가 우승하면 더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한국 선수들끼리 견제도 심했다. 한국 선수의 위법 사실을 서로 신고하는 일도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2차 Korean Invasion은 단단하다. 한국 기업은 JTBC 파운더스컵을 비롯, 기아 클래식, 롯데 챔피언십, 하나-외환 챔피언십의 타이틀 스폰서를 맡고 있다. 한국 기업 모자를 쓴 외국 선수도 많다. 한국 공 회사인 볼빅이 미국 2부 투어의 중요 스폰서이기도 하다.

선수들은 전혀 기죽지 않고 경기하고 있다. 10년 전보다 파워도 세다. 리디아 고는 세계랭킹 1위이며 김효주와 김세영, 장하나, 백규정 등은 세계 랭킹 1위가 될 수 있는 선수들이다. 10년 전 이방인으로 살았던 선배들과 달리 그들은 LPGA 투어의, 아니 세계 여자 골프의 새로운 주류, 새로운 얼굴이 될 것이다. 51년 전 변방에서 온 비틀즈가 록음악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말이다.

비틀즈가 완벽한 팀워크를 이룬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경쟁하고 질투하면서 성장했다. 한국의 신예 선수들도 그렇다. 비틀즈와 다른 건 아직 누가 존 레넌이 될지, 누가 폴 매카트니가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폴 매카트니가 방한해 공연했다. 공연을 본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맥카트니의 퍼포먼스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의 젊고 매력적인 침략자들도 그러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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