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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세컨드샷-서희경 열달의 마법

성호준 기자2015.03.11 오전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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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보다 한층 밝아진 서희경

어둠 속에서 벨이 울렸다. 초등학교 5학년 소녀 서희경은 불을 켤 수 없었다. 소리를 따라 캄캄한 방을 엉금엉금 기어 벽걸이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었다. 엄마였다. 울음이 터졌다.

서희경은 초등학교때 미국 캔자스 주 로렌스의 이모부 댁에서 1년을 살았다. 아버지의 권유로 골프 연습에 좋은 환경에서 지내기 위해서였다. 그가 있던 캔자스는 미국에서 팬케이크보다 더 평평하고 심심하다고 불리는 곳이다. 그 곳에서 어린 서희경이 살았다. 이모는 친절했지만 어린 소녀에게는 엄마가 필요했다. 서희경은 외로웠다. 어느 날 이모와 이모부가 외출을 했다. 미국에서는 어린 아이를 혼자 집에 두면 안 된다. 어른들은 집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불을 끄고 나갔다. 캄캄한 곳에서 서희경은 혼자 있어야 했다.

그 때 전화가 왔다. 1998년의 일이다.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던 때다. 벌써 17년이 지났다.

최근 만난 서희경은 미소를 지으며 “돼지국밥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고 왔어요”라고 했다. 운동을 열심히 하기 때문에 요즘 아주 잘 먹는데도 처녀 때보다 몸무게가 적게 나간다고 했다. 그의 용품 후원사인 브리지스톤 직원들은 “아기 엄마가 된 서희경의 외모가 처녀 때보다 더 매력적”이라고 했다. 실제 그래 보였다. 필드의 패션모델로 불리던 예전보다 생기가 넘치고 턱 선도 날렵했다. 서희경은 10일 미국으로 떠나 LPGA 투어에 복귀한다. 데뷔전은 19일 열리는 JTBC 파운더스컵이다.



다시 미국으로 가는 건 새로운 도전이다. 서희경은 지난해 8월 출산했다. 한국 여성이 엄마가 되어서도 선수 생활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여자 농구의 전주원(43)이 그랬고 현재는 펜싱의 남현희(34) 정도다. 아이를 낳고 해외 리그에서 뛰는 것은 훨씬 어렵다. 한희원(37)과 장정(35)이 지난해까지 투어에 다니다 은퇴했다.

미국에 다시 가는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벌써부터 아들 도현이가 눈에 밟힌다. 서희경은 “지난해 투어를 중단하고 나서 열달 내내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떠날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건 남편 국정훈씨 때문이다. “지금 미련이나 아쉬움 같은 것이 남는다면 나중에 40대, 50대가 되어서 마음이 허전할 것이다. 그 때 엄마로, 부인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지금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해라.”

서희경은 이전에도 열달 공백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미국에서 돌아와서다. 골프 대회에 나갔는데 1등을 달리다 마지막 날 역전패했다. 아버지 서용환씨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미국에 유학도 보냈는데 실력이 더 줄어든 것 같아서 실망했다”고 말했다. 서희경은 억울했다. 한국에서 골프를 하는 친구들은 수업에 잘 안 들어갔지만 미국에서는 수업을 다 받아야 했다. 캔자스는 여름엔 엄청 덥고 겨울엔 춥다. 오즈의 마법사의 배경이 캔자스다. 도로시를 날려 보낸 회오리바람인 토네이도도 종종 분다.

아버지에게 혼이 나고 기분이 좋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골프를 왜 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거다. “사실 내가 골프를 하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거든요. 골프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그냥 취미로 해보라고 해서 한 건데, 잘 치니까 대회 한 번 나가보라고 하고 거기서 성적 좋으니까 계속 나가라고 하고, 제 의지와 상관없이 선수를 하게 됐어요. 못 치면 매우 실망하시고... 미국에 간 것도 아버지의 의지가 더 컸죠.”

서희경은 고집이 셌다. 골프를 안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만만치 않았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부녀는 말을 안 하고 10개월을 지냈다. 아버지와 서먹하게 지낸 건 힘들었지만 서희경은 골프에서 떠난 그 10개월이 꿀처럼 달았다고 했다. “친구랑 삐삐치고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 먹고, 오락실 가서 DDR도 했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아버지에게 흠 안 잡히려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10개월 동안 연습장에서 딸의 골프채를 치우지 않았다. 서용환씨는 “희경이가 연습장 옆을 지나갈 때마다 옛생각이 났는지 안을 흘끔흘끔 보는 것을 알았고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열 달이 지나자 엄마는 연습장에 가서 스윙이나 한 번 해보라고 했다. 이전보다 몸이 자라 거리가 쑥 늘었다. 그게 신기해서 다시 골프를 하게 됐다.

골프가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단다. 그러나 열심히는 했다. 서희경은 일종의 완벽주의자이다. 서희경은 “프로 될 때까지 열심히 했는데 또 지겨워졌어요. 국내 2부 투어에서는 정말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공을 쳤는데 골프를 그만두지 못한 것은 다른 길을 가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서죠”라고 했다.

골프를 꼭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몰랐던 서희경을 그나마 버티게 해 준 힘은 미국 다녀와서 쉰 열 달의 공백이었다. 그 휴식이 서희경을 스윙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이른바 마법의 재킷 사건이 생긴다. 친구 홍란의 우승 재킷을 입은 후 서희경이 첫 우승을 했다. 석 달 동안 여섯 번 챔피언이 되면서 갑자기 투어 최고 선수 자리에 올랐다. 물론 마법의 재킷이란 없다. 우승할 때가 다 돼서 우연히 입어본 옷일 뿐이다.

우승을 많이 할 때는 당연히 좋았다. 그러나 내가 왜 골프를 할까라는 근원적인 물음은 멈추지 않았다. 캔자스의 어둠 속에서 전화 소리를 찾아 헤맸던 기억도 그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남아 있었을 거다.

“열심히 하겠다”고 언론에 말하고 또 그만큼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성적이 안 나면 골프채가 보기도 싫은 적도 있다. LPGA 투어로 가서는 더 했다. 아쉽게 우승을 놓친 적이 많아 더 그랬다. 2011년 US오픈, 2012년 호주오픈, 2013년 하나외환챔피언십 등 연장전에 가서 패한 대회만도 여러 번이다.

2012년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4개 홀을 남기고 4타를 앞서다 역전패 당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김인경이 30cm 퍼터를 놓친 그 대회다. 김인경이 퍼트를 넣었다면 비운의 여인은 김인경이 아니라 서희경이 될 뻔했다.

미디어에 서희경의 아픔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자세하게 새겨졌다. “내가 아주 긴장한 것을 느낄 수 있었죠. 그래서 경기에 지고 나서 화가 많이 났어요. 골프를 더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대회 끝나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와 버렸어요. 그런 일은 아버지에게 혼나고 골프를 그만둔 후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2013년 하반기에는 대회장에 가면 가슴이 막힐 때가 있었다. 도살장 끌려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때 지금의 남편 국정훈씨와 사귀기 시작했다. 국씨로서는 스타인 서희경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아주 좋은 때였을 것이다. 서희경도 “내가 흔들릴 때여서 그런지 그가 더욱 듬직해 보였다”라고 했다.



서희경의 부모는 선수 생활을 더 했으면 하면서도 결혼을 허락했다. “그 때 희경이의 표정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라고 말했다. 서희경은 스물아홉이다. 동료 중 현역으로 뛰는 선수는 많지 않다. 골프는 주요 스포츠 중 가장 선수수명이 긴데 한국 선수들은 오래 못한다. 자의가 아니라 투어 카드를 잃고 타의에 의해 은퇴하지만 사실 본인의 의욕이 줄어들면서 생기는 일이기도 하다.

그 이유를 한 선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이 조로하는 이유는 힘이 들어서가 아니다. 골프 자체는 별로 힘들지 않다. 커다란 짐을 짊어지는 것이 힘든 것이다. 그 동안 온 가족이 나를 위해 다 희생했고 이제 골퍼로 돈을 벌게 되니 나한테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이다. 어려서는 앞만 보고 막 달려왔지만 한참 즐거울 이십대 초중반에 그 짐을 지고 있는 자신을 보면 스스로 안쓰러운 느낌이 든다. 이십대 후반에도 그걸 지고 가는 자신을 보면 짜증이 난다. 골프가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책임, 의무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골프가 안 된다.”

돈은 서희경에게 별 문제가 아니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남편 국정훈씨는 좋은 직장에 다닌다. 서희경은 후원사가 혹시 ‘아줌마 선수’를 부담스러워한다면 자선단체 로고를 모자에 달고 뛰려 했을 정도로 돈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편이다. 그래도 부채의식은 있었다. 어릴 적부터 딸의 성적에 따라 희로애락을 느꼈던 부모님에게다. 서희경은 “내가 버디를 했는지 보기를 했는지에 따라서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확 달라지시는데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서희경은 그 동안 가족의 행복을 위해 공을 쳤다.

서희경은 아버지의 그늘 때문에 힘들어한 친구들을 많이 봤다. “어릴 때 독보적으로 잘 치는 아이들이 있었거든요.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을 받아 잘 치던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가면 다른 아이들과 실력이 어느 정도 비슷해지는데 부모들이 그걸 참지 못해요. 때리거나 아주 혼내거나 그래서 아이는 반발심으로 일부러 OB를 내고 집에 가고 결국 골프를 그만두는 경우가 있었죠. 자신이 공을 쳐야 하는데 부모가 대신 치는 경우 이런 일들이 왕왕 나와요”

서희경의 아버지는 신사다. 그래도 딸의 성공에 대한 욕심이 없을 수는 없다. 서희경은 “얼마나 무서운가를 1에서 10까지 기준으로 구분하면 우리 아버지는 7정도는 됐어요”라고 웃었다. 서용환씨는 “솔직히 공은 희경이가 치는 건데 못 치면 내가 못 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부모들끼리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국정훈씨와 사귀면서 서희경은 자신의 의견을 잘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니라 가족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의사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국정훈씨는 생각했다. 서희경은 “예전에는 아버지가 다 맞춰줬으니까 내가 결정할 것도 별로 없고 의견이 있을 필요도 없었어요”라고 했다. 친구도 없었다. 서희경은 “결혼할 때 청첩장 돌리려고 보니 친구가 중학교 때 친구 몇 명 뿐이었어요. 골프하면서 다들 경쟁자라고 생각했나 봐요”라고 했다.

약혼을 하고 나서 부모님은 경기장에 따라 오지 않았다. 혼자 결정을 하게 됐다. 서희경과 부모님 모두 쉽지 않았다. 딸과 떨어진 서희경의 엄마는 두 달 동안 우울증을 겪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니다. 부모님은 함께 여행을 다닌다. 서용환씨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 조만간 소일거리로 커피숍을 낼 예정이다. 매일 딸이 보내주는 손자 도현이의 동영상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서희경은 “우승을 여러 번 할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단언했다. “경기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 버리고 올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홀가분하기도 하다”고 했다. 서희경은 어릴 때부터 줄리 잉크스터를 좋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가정과 일을 잘 조화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서희경은 자신이 매우 일과 가정을 잘 조절하면서 산다고 느낀다.



이제 미국으로 떠나면서 그의 꿈도 이뤄진다. 아이도 더 낳겠다고 했다. 친구도 늘었다. 남편이 더 즐겁게 친구들과 지내라고 권해서다. “내가 아줌마가 되어서 그런가 싶기도 할 정도로 많이 달라졌어요. 요즘은 산후 조리원 동기들과도 모임도 갖는데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에요.”

서희경은 2주간 대회에 참가하고 2주는 돌아와 아이와 함께 있는 스케줄을 짜고 있다. 여행도 쉽지 않다. 미국 서부 지역은 그나마 괜찮지만 동부지역에서 경기를 하면 시차와 여행 시간 등에서 미국에 캠프를 마련한 선수들과 비교해 매우 불리하다. 출산으로 쉬는 바람에 상금이 큰 메이저대회에도, 아시아 선수에게 유리한 아시안 스윙에도 나가지 못한다. 서희경은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 경쟁해야 한다.

서희경은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기면서 하겠다”고 했다. 그냥 즐기기만 하면 잘 될까. 그는 “이 악물고 즐기겠다”고 한다. “가족과 있을 시간을 빼서 대회에 나가니까 그 시간을 잘 써서 독하게 하려고요. 그렇다면 결과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서희경을를 힘들게 했던 아쉬운 준우승, 연장전 패배 같은 것은 훨씬 적어질 것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골프와 떠나 쉰 열 달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부모님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뛰는 진짜 서희경이 LPGA 투어로 간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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