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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26바퀴 대장정 마친 ‘작은 거인’ 장정

김두용 기자 기자2014.10.21 오전 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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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시즌을 뛰면서 309개 대회를 소화했고, 106만7880km를 이동한 긴 여정이었다. 4만76.6km의 지구를 26바퀴 반이나 돈 장정.

2000년 9월 세이프웨이 LPGA 챔피언십. 신인 장정이 처음으로 우승 기회를 잡았던 대회다. 연장 끝에 김미현에게 패해 눈물을 왈칵 쏟아냈던 10대 소녀 장정은 14년 후 이 대회에서 은퇴 경기를 하며 LPGA 투어의 그린대장정을 마감했다.

14시즌을 뛰면서 309개 대회를 소화했고, 106만7880km를 이동한 긴 여정이었다. 4만76.6km의 지구를 26바퀴 반이나 돈 장정. 아직 끝나지 않은 그녀의 긴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세리 ‘날 버리고 가느냐’

장정은 박세리, 박지은, 김미현 등과 함께 LPGA 투어를 누볐던 1세대 골퍼다. ‘주부골퍼’ 장정과 한희원이 은퇴하면서 이제 박세리만 현역으로 남게 됐다. ‘맏언니’ 박세리는 장정과 함께 훈련하며 세계무대의 꿈의 키웠던 선배. 같은 대전 출신이고 담력을 키우기 위해 함께 공동묘지를 거닐었던 동료이기도 하다. 한때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지만 힘든 시기에 동고동락했기 때문에 애정이 남다르다.

그럼에도 장정은 박세리에게 “말도 없이 날 버리고 가느냐”라는 서운함이 진하게 담긴 메시지를 받아야 했다. 박세리가 어깨 부상으로 국내에 있었던 터라 미처 은퇴 소식을 알리지 못한 것이다.

장정은 “은퇴를 결정한 후 세리 언니와 한 번도 만나지 못해 말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좀 섭섭해 했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지난 10월 장정이 국내로 돌아왔고 둘은 서운한 감정을 풀었다.

2012년 은퇴를 선언했던 박지은은 장정의 눈물샘을 다시 자극했다. 장정은 “은퇴했을 때 내 곁의 사람이 진심으로 ‘수고했다’는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종종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은 언니가 ‘수고했다고 해주고 싶고 장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와 정말 울컥했다”고 말했다. 은퇴 후 허전했던 가슴이 이 말 한 마디에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잊을 수 없는 잉스터, 소렌스탐, 김미현

은퇴 경기였던 포틀랜드 클래식 2라운드가 끝난 뒤 장정은 서프라이즈 파티에 감동 받았다. 서프라이즈 파티를 주도했던 인물이 살아 있는 전설 줄리 잉스터라 더욱 뜻 깊었다. 장정은 “잉스터와 팻 허스트 등 외국 선수 20명이 희원 언니와 저를 위해서 은퇴식을 열어줬다. 투어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잉스터가 축하해줘 더욱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장정과 한희원은 포틀랜드 클래식 2라운드가 끝난 뒤 줄리 잉스터 등이 주도한 서프라이즈 파티에 감동 받았다.

장정의 가장 눈부신 업적은 2005년 브리티시 여자오픈 우승. 당대 최고의 선수 안니카 소렌스탐을 따돌리고 따낸 타이틀이라 더욱 값졌다.

장정은 “최종 라운드에서 소렌스탐과 함께 경기를 하게 돼있었다. 그래서 3라운드 후 ‘내일 소렌스탐과 치는데 떨리지 않느냐’고 기자들이 질문했던 게 아직까지도 생생하다”며 “그래서 ‘소렌스탐과 경기하는 것보다 내가 선두라는 게 더 떨린다’라고 답했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우승 문턱에서 좌절한 경험이 많았던 터라 선두로 출발하는 게 너무 싫었고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결국 소렌스탐을 7타 차로 따돌린 장정은 고대했던 LPGA 투어 첫 우승컵을 품었다. 그는 “18번 홀 우승 퍼트를 넣은 뒤 소렌스탐이 나를 향해 박수를 치며 축하해줬는데 정말 뭉클했다”고 우승 순간을 되돌아봤다.

2000년 세이프웨이 챔피언십에서 김미현에게 연장 접전 끝에 패한 건 악몽이었다. 그는 “연장 두 번째 홀에서 3퍼트 보기로 패했다. 이로 인해 3퍼트 악몽에 6개월은 시달렸고 정말 많이 울었다. 이 대회에서 은퇴 경기를 했기 때문에 ‘그때 우승을 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혼자만의 상상도 했다”고 고백했다.

부럽고 대견한 후배들

장정은 15년 전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세계무대를 노크했다. 지금은 먼 거리를 비행기로 이동하지만 당시에는 차를 타고 넓은 미국 대륙을 횡단해야 했다. 차멀미까지 하는 장정에게 장거리 이동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는 “한 번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올랜도까지 3박4일을 차를 타고 이동해 대회장에 도착했던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수 천 km를 달려 대회를 치르곤 했던 장정은 14년 동안 무려 106만7880km를 이동했다. 4만76.6km의 지구를 26바퀴 반이나 돌았고 지구에서 달까지 왕복한 뒤 지구를 7.5바퀴 다시 돈 엄청난 대장정이었다.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 후배들은 주로 비행기로 이동하고 예전과는 달리 쉽게 LPGA 투어에 적응하고 있다. 장정은 “그 때와 비교하면 프로페셔널하고 세련됐다는 느낌이 든다. 국내에서 2~3년 프로 적응기를 거친 뒤 좀 더 준비된 상태에서 미국에 진출하는 후배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언어부터 시작해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투어를 누빈다”고 대견해 했다. 골프 이론, 기술, 훈련 방식, 용품 등 모든 게 달라졌고, 선수들도 끝없이 기량이 늘고 있다는 게 장정의 설명이다. 현재 한국 선수들이 LPGA 투어를 주도하고 있어 1세대를 풍미했던 선배로서 더욱 뿌듯하다.

다만 장정은 “카리 웹과 줄리 잉스터처럼 오랫동안 전성기 기량을 유지하는 후배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3번의 손목 수술 후 통증이 심해져 은퇴를 결정한 장정은 이제는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3년 반 동안 캐디이자 남편으로 든든히 자신의 곁을 지켜준 이준식 프로 그리고 사랑스러운 딸 이슬. 이제 엄마 장정의 새로운 대장정이 시작된 셈이다.


이준식 프로는 장정의 남편이자 캐디로 3년 반 동안 그림자처럼 곁을 지켜줬다. 둘은 필드에서도 잉꼬부부의 모습을 보여 선수들의 부러움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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